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시우스 2세 (문단 편집) ===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아테나이스) 황후 === 풀케리아는 421년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필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처녀를 골랐다. 이 소녀는 '이교도'이자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Leontius)의 딸 아테나이스(Athenais)였다. 아테나이스는 아름답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점잖았기에 점잖고 학구적인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필로 손색이 없었다. 아테나이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시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라고 새로이 이름을 취했다. 특히, 그녀가 황후가 된 사건은 당시 동로마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교'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이듬해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훗날 한국식으로 따지면 5촌 [[당숙]](아버지 테오도시우스 2세의 배다른 고모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되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한다. 즉 [[근친혼]]이다.]라는 딸을 낳았고 423년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에우도키아는 황궁 안에 그리스적인 분위기를 많이 가져왔고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와 융합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425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본격적인 대학교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웠다. 대학의 강의실들은 원로원 의사당에 마련되었고, 그리스어 문법과 라틴어 문법에 각각 10명의 교수들이 배정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 수사학에 5명의 교수를, 라틴 수사학에 3명의 교수를, 법학에 2명, 철학에 1명의 교수를 두어 학생들을 길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 수사학에 배정된 교수가 5명으로, 라틴 수사학의 3명보다 많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